1887년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페트롭스키 농업학교에 진학하면서 과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세계 곳곳을 누비는 식물학자로 성장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 계기가 됐다.

1916년 식물학자 자격으로 전장에 파견된 바빌로프에게 주어진 임무는 러시아 북부 농지를 초토화한 흰가루병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

그는 흰가루병에 내성이 강한 밀 품종을 찾아내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본격적으로 세계 각지를 돌며 씨앗 찾기에 나섰다.

서른살 나이에 젊은 농학 교수가 된 바빌로프는 192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파미르 고원부터 에티오피아, 아마존 열대 우림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을 찾아나섰다.

그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근간으로 식물 배양을 시작했고 후에 최초의 식용식물 국제종자은행을 설립하는 결실을 이뤘다.

바빌로프는 55살의 나이에 스탈린의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감옥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지만 사후에도 그의 연구 철학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식물종 유전자 수집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2008년 노르웨이에 들어선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가 대표적 사례로, 전 세계 모든 재래식물의 종자가 영하 18도 상태에서 보존된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꼽힌다.




1930년대 대기근이 닥치자 스탈린은 바빌로프를 소련 인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세계 유람이나 다닌 부르주아 반동, 소련의 농업을 고의로 망쳐먹은 간첩협의로 투옥하였다.

총살형까지 선고받은 바빌로프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탄원으로 죽음을 면하였으나, 수용소에 갇혀 지내다가 1943년 생을 마감하였다.



바빌로프는 1929년에 일본을 방문하면서 한국도 함께 둘러 보았는데 부산에서부터 신의주까지 기차로 이동하면서 몇몇 곳에 들러 밀, 콩, 팥, 녹두, 동부, 호박 등을 수집하였다.

바빌로프는 이듬해인 1930년에 한국 수집자원을 등록하였고, 바빌로프 연구소는 그 후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 수집된 한국원산 자원을 보존하고 있다.